[F1 GP 명예의 전당② 알랭 프로스트] ‘서킷의 교수’로 사랑받았지만 A. 세나와 같은 시대 활동은 불운?

알랭 프로스트는 1955년 2월 24일 프랑스 중심부에 위치한 루아르 지방 생샤몽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터 혈기 넘치던 그는 레슬링, 롤러스케이트, 축구 등 온갖 스포츠에 푹 빠져 지냈다. 어린 알랭은 처음에는 헬스 트레이너나 축구 선수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4살 되던 무렵 가족끼리 여름휴가를 갔다가 본 카트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로 시작했던 것이 점점 그 어떤 스포츠보다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알랭 프로스트는 4회 월드챔피언이라는 명예에도 불구하고 천재 드라이버 세나와 같은 시대에 호흡하는 불운으로 그에 걸 맞는 영광을 누릴 기회를 많이 잃었다.

알랭 프로스트는 4회 월드챔피언이라는 명예에도 불구하고 천재 드라이버 세나와 같은 시대에 호흡하는 불운으로 그에 걸 맞는 영광을 누릴 기회를 많이 잃었다.

몇몇 카트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하면서 충분한 재능을 보여주던 알랭은 1974년 학교를 떠나 프로 드라이버의 세계로 뛰어 든다. 스스로 돈을 마련해야 했던 그는 엔진을 튠업하고 카트를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75년 프랑스 시니어 카트 챔피언십과 포뮬러 르노 우승컵을 손에 넣으며 F3에 진출한다. 알랭은 1978년과 1979년 프랑스와 유럽 F3 챔피언 타이틀을 연이어 따내는 등 맹활약을 펼치면서 F1 팀들이 탐내는 드라이버 1순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1980년 고민 끝에 알랭은 맥라렌을 선택하며 F1 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F1 데뷔 첫 해에 포인트권 4회 진입이라는 신인으로써는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동시에 팔목이 부러지는 등의 사고를 내기도 했다. 머신에 대한 불안감이 사고의 주원인이라고 생각한 그는 더이상 자신의 팀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결국 신랄한 다툼 끝에 2년 계약을 파기하고 로노로 옮겨간다. 1981년 프랑스 팀에 속한 알랭은 프랑스 차를 가지고 프랑스 GP에서 F1 데뷔 이래 첫 우승컵을 품에 앉는다. 우승 후 인터뷰에서 알랭은 그전에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면 지금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 후 그는 르노와 함께 세 시즌을 보내며 9회나 시상대의 정상에 섰다. 그러나 르노는 챔피언 타이틀 획득에 실패한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기려 하고, 믿었던 프랑스 팬들은 팀 동료이자 프로스트의 경쟁자인 R. 아르누를 더 선호했다. 이 모든 것에 지친 그는 또다시 훌쩍 팀을 떠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스위스로 옮겨간다. 1984년 그곳에서 다시 맥라렌과 손을 잡고 레이스로 돌아왔다.

 

세기의 대결 프로스트 & 세나

프로스트는 이후 맥라렌과 여섯 시즌을 함께 보내며 30회의 우승을 거머쥐었고 종합 우승 3회, 종합 2위 2회 등 맹위를 떨친다. 1985년 첫 드라이버 타이틀을 시작으로 1986년에도 연속 월드챔피언에 오른다. 잭 브람밤 이후 10년 만에 2년 연속 챔피언 타이틀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1987년 28번째 우승을 차지해 재키 스튜어트가 14년 동안 갖고 있던 최다 우승 기록을 가뿐하게 경신한다.

1988년 맥라렌은 열여섯 경기 중 15회 우승이라는 완벽한 레이스를 펼쳤는데 그 중 7회를 알랭이 뽑아냈다. 그러나 이 해 그의 동료이자 최대의 라이벌 A. 세나가 8개의 우승컵을 챙기며 챔피언 타이틀을 앗아간다. 이 때 부터 시작된 두 천재 드라이버의 대결은 전례를 볼 수 없는 명장면을 연출하며 점점 더 뜨거워 졌다. 팬들도 환호와 경악 그리고 흥분의 도가니에서 헤어날 줄 몰랐다.

프로스트는 ‘교수’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철저하게 계산된 레이스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던 것. 특히 세나라는 강력한 라이벌을 물리치려면 자신의 드라이빙 기술과 함께 온갖 지력을 동원해야 했다. 사실 순수하게 스피드만 놓고 겨루었을 때 세나를 능가하기란 불가능했다. 대신 프로스트는 재키 스튜어트나 니키 라우다가 그랬던 것처럼 철저한 경기 분석을 통한 완벽한 작전으로 강력한 라이벌을 따돌려야 했다. 그에 반해 세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을 선호했다(결국 이것이 비극적 결말의 주원인이 되었지만).

1989년에도 여전히 맥라렌 팀 동료였던 프로스트와 세나의 경쟁은 한층 더 치열해졌다. 이제 서로의 재능에 대한 존경과 팀 동료로써의 예우 따위는 오간데 없었다. 프로스트는 세나의 저돌적인 드라이빙과 맥라렌과 혼다 양쪽 모두 세나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데 강력하게 항의했다. 갈등은 스즈카에서 극에 달했다.

세나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오며 알랭의 머신 앞으로 치고 들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동안 어느 정도 양보를 해오던 프로스트였으나 인내심이 이미 바닥나 있었던 그는 세나를 무시하고 속도를 높였다. 두 머신은 충돌했고 이 사고로 세나는 그 해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포기해야 했다. 프로스트는 이 사건 이후 페라리로 이적한다.

1990년 페라리로 옮겨갔어도 세나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다시 스즈카 서킷, 이번에는 세나가 지난번 프로스트와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했고 세나가 타이틀을 거머쥔다. 물론, 프로스트는 “정말인지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세나는 형편없는 인간이다”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1991년 페라리 머신의 성능이 뚝 떨어지면서 알랭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시즌 내내 한 개의 우승컵도 따내지 못했다.

이에 프로스트는 페라리 팀의 운용 능력을 공공연하게 비난했고 시즌이 끝나기 전에 해고당한다. 곧장 옮겨갈 곳을 찾지 못한 그는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 1992년은 운전대를 놓고 TV 해설가로 활동했다. 1993년 윌리엄즈-르노로 돌아온 프로스트는 우승컵을 7개나 휩쓸면서 다시 한 번 챔피언에 오른다. 하지만 윌리엄즈에서 세나를 영입하려하자 곧바로 은퇴를 선언한다. 둘 사이의 골이 그만큼 깊었던 것.

알랭은 은퇴 후에도 TV해설, 테스트 드라이버 등으로 F1 무대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다가 1997년 리쉬에르 팀을 사들여 자신의 이름을 딴 ‘프로스트’의 오너로 컴백한다. 하지만 재정상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2001년 프로스트는 간판을 내렸다. ‘서킷의 교수’라는 애칭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스트. 그는 4회 월드챔피언이라는 명예에도 불구하고 천재 드라이버 세나와 같은 시대에 호흡하는 불운으로 그에 걸 맞는 영광을 누릴 기회를 많이 잃었다.

 

1985~1986, 1989, 1993년 월드 챔피언 타이틀 4회

그랑프리 스타트: 197회/ 그랑프리 우승:51회/ 폴포지션: 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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